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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는
인삼(산삼)의 부족 현상이 고려 말엽 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였으며 중국으로부터의 요구와 왕실의 수요를 충당하기 위한 관의 주구가 혹심해지고,
할당량을 조달하기 어렵게 된 산삼 산지의 지방민들은 고향을 떠나는 사태마저 빈번하였다 한다.
따라서 이 시기에 즈음하여 인삼의 재배를 시도하였을 가능성은 충분하며 1578년에 저술된 이시진(李時珍)의 본초강목(本草綱目) 중에
"亦可收子於十月下種如種菜法"이라 하여 당시 우리나라에서 인삼이 재배되고 있었음을 명백히 기술하였다.
그런데 문장중에 "於十月下種"이라는 표현은 음력 10월(양력 11월) 중에 인삼종자를 파종 하였음을 뜻하는데 인삼 종자의 성숙기가 양력
7월 하순임을 감안할 때 채종기와 파종기간에 약 100일 이상 공백기간이 발생한다.
따라서 인삼 종자의 채종기와 음력 10월의 파종기 사이에 존재하는 공백기간은 종자처리 즉 개갑(開匣)을 실시하였던 기간으로 추정되며
1500년대에는 이미 인삼 종자를 개갑 처리하여 파종할 정도로 인삼 재배 기술이 발전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인삼의 재배가 시도된 후 종자를 개갑 처리 하여 파종할 정도로 재배 기술이 발전되고 또한 인삼 재배가 일반화되어 중국에 알려지게
되기까지에는 최소한 100년 이상의 기간이 소요될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의 인삼 재배는 늦어도 1300년대 후반 즉 고려말 경에는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영조(英祖) 원년에 송도(松都)의 삼농민들이 일복식삼영농(日覆式蔘營農)을 크게 일으켰다는 기록으로 보아 영조대에는 이미 기술적으로
크게 발전되고 전국적으로 일반화되었던 시기로 보이며, 정조(正祖)14년의 기록에는 경상(慶尙), 원춘(元春) 양도의 봉진물 중에 가삼(家蔘)이
많다고 하였는데 가삼이란 재배 인삼을 뜻하며 이는 당시에 인삼재배가 전국적으로 성행하였음을 입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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